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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여

전래동화 섹슈얼리티

어른이 된 뒤 다시 보면 안다. 어린 시절 눈을 빛내며 들었던 동화나 전설이 얼마나 잔혹한 이야기였는지. 우리가 그때 잔혹성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몇 가지로 추론할 수 있다. 우선 몇 가지 ‘심의 기구’의 존재다. 옛이야기를 어린이용으로 각색한 동화책 혹은 구전한 어른들은 원작 속 ‘적절치 않은’ 표현을 걸러내고 아이에게 들려줬다. 예를 들어 “까마귀가 눈알을 파냈다”는 표현은 “벌을 받았다”로 바꾸었다.

또 아이는 아직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온전히 모른다. 이야기를 이야기로 소비할 뿐, 그것이 세상의 가혹함, 부조리, 울분에 가닿아 있음을 알아내기 어렵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어딘가에 흥부 가족처럼 가난해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음을, 변학도처럼 권력을 이용해 성을 착취하려는 사람이 있음을, 심청처럼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사람이 있음을 안다면 그 이야기를 웃으며 즐길 수 있을까.

가족기담 |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60쪽 | 1만4000원 

 

한국 고전문학 전공자이자 소설가인 저자는 <가족기담>에서 한국의 고전 속 가족에 대한 오싹한 사실을 들춰본다. 예전에 들었을 때는 무심코 넘겼는데, 다시 설명을 듣고 보니 섬뜩하다. 처음엔 그렇게까지 과격하게 해석해야 할까 싶다가도, 결국 그 해석에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섬뜩하다.

다들 알다시피 한국의 옛 사회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 중심이었다. 효자·열녀 등은 가족과 관련된 가치에 보통 이상으로 헌신한 이들인데,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고전이 많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그런데 ‘보통 이상’이란 의미를 삐딱하게 보면 ‘비정상’이다. 고전 속 가족 이야기가 어째서 비정상인지, 이 비정상성이 현대사회의 가족관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는 것이 저자의 목표다.

충격적인 해석부터 살펴보자. <장화홍련전>이다. 장화·홍련은 친모가 타계하고 친부·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집안에 들어와 아들만 셋 낳은 계모는 장화·홍련을 박대한다. 옛이야기 속 계모가 전처 소생을 못살게 구는 것이야 동양이나 서양이나 비슷하긴 하지만, 저자는 이쯤에서 의문을 표한다. 조선시대 관습을 따지면 어차피 재산은 계모의 아들에게 돌아가게 돼 있고, 장화·홍련은 시집가면 그뿐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계모는 장화·홍련을 죽이려 하고, 친부인 배 좌수는 장성한 딸을 시집보내지 않는다. 친모가 죽으면서 “두 딸을 어여삐 여겨주시고 장성한 연후에는 좋은 가문에 배필을 얻어 봉황과 같이 아름다운 짝을 지어주세요”라고 유언을 남겼는데도 말이다.

저자는 배 좌수와 두 딸들 사이에 ‘있어서는 안될 일’, 즉 성적 학대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계모는 쥐를 짓이겨 장화의 이불 속에 넣어둠으로써 장화가 아이를 유산했다는 모략을 꾸민다. 언제나 딸들을 감싸고 돌던 배 좌수는 이 모략에 홀랑 넘어간다. 배 좌수가 딸의 임신과 낙태 문제에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이성을 잃은 것도 이같이 끔찍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뒤에 징치를 받는 것은 계모일 뿐이다. 배 좌수는 자신이 초래한 비극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다시 새장가를 가 자식을 낳는다.

배 좌수는 예외적이긴 하다. 옛이야기 속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위해 헌신한다. 옛날보다 훨씬 적은 아이를 낳는 요즘의 부모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헌신과 집착의 경계는 모호하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에서 떡장수 어머니는 고개 하나 넘을 때마다 호랑이에게 떡을 주고, 결국 자신의 양팔과 다리까지 내준다. 호랑이가 결국은 어머니를 잡아먹을 것이라는 점은 어머니 자신도 아는 사실일 테지만, 어머니는 호랑이가 어린 자식들에게 다가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체시키기 위해 수를 낸다. ‘떡’에서 성적 은유를 읽어내고, 수많은 고개를 우리 인생의 고비라고 여긴다면 이야기는 순식간에 절박해진다.

아들만 셋 둔 천석꾼 부잣집 부부가 결국 예쁘고 깜찍한 딸을 얻지만, 알고보니 그 딸이 구미호라 집안 가축에다 사람까지 모두 잡아먹어 버린다는 것이 ‘여우 누이’ 이야기의 골자다. 일찌감치 막내 여동생의 정체를 눈치챈 첫째와 둘째 아들은 부모님에게 그 사실을 고하지만, 막내딸의 재롱에 넋이 나간 부모님들은 도리어 두 아들을 쫓아낸다. 구미호는 소의 항문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피가 뚝뚝 흐르는 간을 빼내 잡아먹는다. 아마 사람도 그렇게 잡아먹었을 것이다. 부모가 예쁜 딸을 원했다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간과 쓸개를 내줄 때까지 자식의 실체를 몰랐다는 것은 죄다. 저자는 묻는다. “우리 애가 그럴 리 없어요”라고 말하는 현대의 부모라고 다를까.



옛 가부장들의 무능과 허위의식도 통렬히 비판한다. ‘집안 대 집안’의 계약관계였던 옛 결혼에서는 딸, 아들 모두 부모님이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딸과 아들의 처지는 조금 다르다. 딸은 평생 한 남자만 바라보고 살아야 했던 반면, 아들은 집안이 선택한 처 말고 자신이 선택한 첩을 둘 수 있었다. 그래서 처가 자신과 맞든 안 맞든 상관이 없었다. 음심이 동하면 몸종이든 누구든 강간하는 것이 허용됐다. 홍길동의 아버지 홍 판서가 그랬다. 낮잠을 자다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소반에 차를 받쳐들고 들어온 18살 몸종 춘섬의 몸을 탐했다. 그 결과 춘섬은 길동을 낳았다. 그나마 길동은 빼어난 능력을 발휘해 영웅 행세를 했지만, 그 어머니 춘섬은 평생을 뒷방에서 보내며 천천히 늙어가야 했다.

계모와 첩은 옛이야기에서 사악함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그 사악함이 인간 본성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같은 처지의 여자들이 오직 한 남자만 바라보게 만든 시스템은 여자들끼리의 투기와 질시를 조장했다. 투기를 한 여자는 “창자를 토해내게 해서 물로 세척하고 뼈를 발라서 긁어내는” 벌을 받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아무리 사악한 첩이라도 가부장의 손아귀에 놀아났다.

“좋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어린 몸종을 덮치는 가부장들이 무슨 생각을 못할까. 가부장은 급기야 기녀에게 절개를 요구했다. <구운몽>의 계섬월과 적경홍이 바로 ‘지조 높은 기녀’의 전형이다. 양소유를 만난 뒤 그에게 헌신하기로 한 두 기녀는 어느 권력자가 수청을 들라 해도 모두 거부한다. 생계 수단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19세기 작품 <옥루몽>에선 기녀에게 절개를 넘어 처녀성을 요구하는 지경에 이른다. 강남홍은 과거를 보러 황성으로 올라가는 가난한 선비 양창곡을 따르며 그에게 평생을 바치기로 한다. 황 자사가 강남홍의 미모를 탐하자, 강남홍은 강물에 투신하기까지 한다. 훗날 양창곡은 남쪽 오랑캐를 치러 전장에 나가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무술을 연마하던 강남홍은 남장을 하고 전장에 뛰어든다. 그러나 가부장에게 여자는 끝까지 여자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여자는 남자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야 할 첩일 뿐이다. 고전 속에 드러난 이 같은 남성 판타지는 여성을 오직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현대의 포르노그래피를 닮았다. <옥루몽>은 양창곡을 간신을 척결하고 나라를 바로 세운 영웅적 주인공으로 그린다.

가부장들은 왜 그랬을까. 일단 ‘밥그릇 싸움’이다. 첩의 자식을 차별해 높은 지위를 주지 않았던 것은 한정된 관직 수와 관련 있다. 적자끼리 경쟁해도 좋은 자리를 얻기 힘든 판에, 서자까지 끼어든다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부가 재가하지 못하도록 한 것도 같은 이유다. 가부장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들의 결혼과 출산을 제한한 것이다.

모든 옛이야기들이 남성 판타지, 가부장 이데올로기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질서를 반영했을까. 조선 초기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최고운전>은 그런 면에서 전복적인 텍스트다. 신라시대 실존인물인 최치원의 삶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영웅의 탄생을 그린 ‘야래자설화’와 무너진 질서를 재건하는 영웅을 묘사한 ‘지하국대적퇴치설화’를 절묘하게 섞어놓았다. 금돼지에게 잡혀갔다 돌아온 최충의 아내는 최치원을 낳는다. 최충은 치원이 금돼지의 자식이라고 생각해 바닷가에 내다 버리지만, 선녀가 내려와 치원에게 젖을 먹이는 등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자 다시 아이를 데려오게 한다. 하지만 3살짜리 최치원은 아버지를 ‘잔인하고 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홀로 지내며 글을 읽고 쓴다. 이후 최치원은 중국 황제의 시험을 이겨내는 등 영웅적 활약상을 보이지만, 신라 왕은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한 최치원을 반기지 않는다. 최치원은 홀로 가야산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저자는 “자식들이 부모를 배반한다는 것은 심란하게도 진실”이라면서도 “그렇게 우리 사는 세상이 조금씩 나아져 온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다름이, 아이들의 배반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강조한다. 가족은 때로 기담, 공포영화의 소재가 될 정도로 끔찍한 집단이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집단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부부의 다름을 인정하고, 자식의 ‘배반’을 허용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가족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가족기담>의 서술은 흥미롭지만, 장마다 그 방식이 불균형하다는 점은 아쉽다. 어떤 장에선 고전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지적 자극을 주는데, 어떤 장은 요즘 유행하는 철학적 자기계발서같이 독자들을 ‘멘토링’하는 데 주력하는 듯 보인다. 책의 목적을 좀 더 분명히 설정했으면 어땠을까 싶다.